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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2. 10. 4] [시론] `저팬 리스크`의 본질

2012.10.08 3787

[시론/10월 4일] '저팬 리스크'의 본질


이동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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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는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여러 골칫거리가 있다. 북한 핵개발로 대변되는 한반도(혹은 북한) 문제나 중국위협론으로 읽히기 일쑤인 중국 문제가 대표적인 지역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 정부의 돌출된 행태를 보면 이 지역을 불안케 하는 요인으로서 '저팬 리스크'를 비중 있게 보태야 할 것 같다. 과거사와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핏대를 올리는 일본의 역주행이 우려 수준을 넘어 어느덧 지역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위협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팬 리스크'는 이제 역내 해결마저 불투명해 유엔에서 주변국들이 한목소리로 '반성 없는' 일본을 성토할 정도로 세계적 화두가 됐다.

분명한 점은 '저팬 리스크'의 화근이 일본 자신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북방 4개 섬은 모두 19세기 이래 일본 제국주의의 대외 팽창사와 오버랩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근대 이후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의 대부분은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촉발됐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는 원격지 제국주의였던 서구와 달리 인접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이웃 국가들에게 씻기 어려운 감정의 앙금을 남겼다. 따라서 작금의 영토 문제는 지금의 일본이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고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일본의 해명은 여전히 제국주의 시대의 논리를 맴돈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지난달 26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분쟁해결을 위한 방책으로 '법의 지배'를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의 법치주의 운운은 허울 좋은 국제법으로 '불편한' 역사를 봉인하려는 꼼수에 불과하며,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반박한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제국주의 시대 국제법이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일본이 영토 문제를 거론할 때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는 아예 탈식민지화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은 한국이 실효지배 중인 독도와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에 대해 국제법의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법리 모순에 빠졌다. 일본은 코에 골면 코걸이식의 법치주의를 앞세워 '미래지향'을 주창하지만 역사인식의 공유 없는 미래지향은 공허할 뿐이다.

20세기 초반 동북아 최대의 가해자였던 일본은 그 후반에는 냉전의 최대 수혜자였다.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내주고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경제성장에 전념하는 '기지국가'가 됐고, 여기에 '평화국가'라는 허상이 덧씌워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자행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반성은 사장됐다. 일본인들은 '핵 공격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지만, 왜 핵 공격을 당했는지를 따지지 않았다. 일본인의 피해의식은 일본의 침략에 의한 이웃나라의 피해의식과 결코 동격일 수 없는데도, 일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눈을 감았다.

일본은 스스로가 동북아시아의 '문제아'로 간주되는데 대해 아주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어떤 일본인은 95년 무라야마 담화 등을 들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최근 일본 정부의 언동은 결코 사과한 자의 모습이랄 수 없다. 진정성 없는 사과는 말짱 도루묵이다. 동북아 국제정치는 국내정치라는 말이 있지만, 영토 문제는 일본 내셔널리즘에 불을 질렀다. 일본은 이제 누가 집권해도 고삐 풀린 우경화의 길로 들어설 태세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오에 겐자부로 등 지성인들이 자성을 촉구하지만, 일본 국민은 우경화 바람을 탄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를 최상의 차기 총리로 여긴다.

중국에 '고양이와 일본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등장했다. 이 또한 돌출적 민족주의의 발현이다. 그러나 '저팬 리스크'는 남을 탓하기 전에 일본 스스로 리스크의 본질을 깨닫는 게 핵심이다. 더 많은 오에와 무라카미가 양심의 목소리에 낼 때 일본은 '저팬 리스크'를 넘어 당당하게 지역의 일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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