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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북한연구센터장)_ [칼럼] 평양 정상회담의 추억, 세계일보, 2018.8.20

2018.12.18 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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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9일 아침, 오후 6시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되는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구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38도 선을 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측의 고위급 인사가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논란이 뒤따랐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김구와 김규식 선생을 초청하기에 앞서 평양에 온 남측의 특사에게 “우리가 통일을 위해 만나 이야기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다. 두 선생님께서 무조건 이곳으로 오셔서 우리와 상담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온건 성향의 김규식 선생은 미국 하지 중장의 만류를 감안해 사유재산제도 승인 등 5개 조건을 김일성 주석이 승인하면 북행(北行)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일성 주석은 즉각 5개 항을 승인했다는 암호를 평양방송을 통해 알려왔다. “자주통일은 이 길밖에 없다”며 김구 일행은 당일 북행 저지를 위해 경교장(京橋莊)을 에워싼 우익청년과 학생을 간신히 따돌리고 뒷담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 선생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놓고 당시 평가는 엇갈렸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그로부터 52년 후 남측의 대통령이 북한 사회주의의 성지(聖地)인 평양을 방문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추억은 강렬했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순안공항에 도열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수뇌부와 함께 꽃술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환호하는 평양시민이 연출한 광기 서린 장면은 완벽한 영화 세트장인 북한이기에 가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벤츠에 동승하며 미끄러지듯 사라지자 연도에서 기다리던 주민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많은 사람은 두 사람이 승용차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궁금해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도 임기 말이기는 하지만 특별했다.

남북한 간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장면에서 정상회담보다 흥분되고 극적인 연출은 없었다. 최고 지도자가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민족문제를 논의하자는 대의명분을 압도할 논리는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대면해서 첨예한 문제를 해결한 전례는 발견하기 어렵다. 김구 선생의 불타는 애국심에도 김일성 주석과의 협상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와 유엔의 결정에 의한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했다. 하지만 2년 후 북의 남침으로 무력적이고 자주적인 통일이 시도됐다. 평화적으로 민족이 힘을 합쳐 통일을 이루기를 희망했던 김구 선생의 꿈은 민족보다는 이념이 우선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연기처럼 사라졌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의 결과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은 체제보다는 민족에 방점을 두었다.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지난해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핵 문제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발사 성공 주장으로 민족 내부의 문제를 넘어 글로벌 이슈화됐다. 동북아의 국제정치를 뒤흔들 수 있는 메가톤급 이슈로 부상함에 따라 최초로 북·미 간의 정상회담이 개최됐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북·미가 물밑 접촉을 통해 북한이 비핵화의 ABC인 핵시설과 미사일의 신고, 사찰 및 검증의 부분적인 일보를 내디뎌 6·25 전쟁의 종전선언을 도출하는 시나리오가 논의되고 있다. 악마는 이행의 디테일에 있다는 경험에 따라 생산적인 결과의 도출 여부는 미지수다.

한반도 문제의 운전자를 자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9월 평양 방문이 발표됐다. 평양 정상회담은 통상 회담과 달리 일정이 사전에 확정되지 않고 매우 유동적이다. 행사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갑의 위치인 평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기존 두 차례 회담의 교훈이다. 형식이 불확실하니 회담의 성과 역시 미지수다. 홈그라운드인 평양 회담은 과거 김일성 주석의 김구 일행 초청에서와 같이 자신들의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에 남측 인사가 조연으로 참여하는 격이다. 3차 9월 평양회담은 형식에 상관없이 비핵화에 디딤돌을 놓지 못한다면 과거 고위급 인사의 평양회담과 차별화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비핵화와 협력의 균형이 무너지는 민족문제 시각보다는 국제정치로 접근하는 방식이 한반도 비핵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출처] - 세계일보
[원본링크] - http://www.segye.com/newsView/2018081900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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