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1. 6. 24][시론/이신화] 반기문, `만인의 연인`보다 `난세의 영웅` 되라
2011.07.04 64001
[시론] 반기문, '만인의 연인'보다 '난세의 영웅' 되라
21일 유엔 총회에서 192개 전 회원국 대표들은 제8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재선(再選)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자리에서는 세계적 난제 해결과 유엔 개혁에 앞장서 온 반 총장의 리더십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특히 '평화와 안보의 챔피언'이라고 그를 칭송하는 수전 라이스 미국대사의 지지 발언은, 불과 2년 전 그를 '너무 무능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이라고 폄하한 미국의 한 외교전문지 기사와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반 총장은 선출과정부터 밀실 발탁이라는 비방과 친미(親美)인사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고, 취임 초 유엔을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내부 반발에 부딪혔다. 또한 그의 조용한 리더십은 언변이 뛰어나고 카리스마가 넘쳤던 코피 아난 전임 사무총장과 비교해 "존재감이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 총장은 살인적 스케줄을 부지런히 소화해내는 성실함과 인간적 친화력을 바탕으로 기후변화, 핵 비(非)확산, 여성지위 향상 등을 글로벌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미얀마·아이티 같은 재난지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 강화와 아랍 민주화 과정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초창기 그에 대한 비판여론을 극복하고 '동양적 리더십' '발로 뛰는 조용한 외교'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게 됐고 연임에도 성공했다.
내년부터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하게 될 반 총장은 글로벌 이슈나 유엔 개혁뿐 아니라 한반도 현안에 대해서도 보다 소신 있고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반 총장이 북한 핵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상황 인식과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의지를 바탕으로 평양 방문과 남·북 정상회담 중재 의사를 밝힌 것은 환영할 만하다. 특히 향후 5년 이내 북한 내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그의 행보에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반 총장을 통해 남북관계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지나친 기대나 그렇지 못할 경우의 무분별한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 반 총장은 한국보다는 한반도와 동북아, 더 나아가 국제사회 전체를 고려하고 행동해야 하는 '지구촌의 조정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출신의 유엔 수장(首長)이 관여한 중재 노력이 북한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경우, 북한의 반발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에는 유엔 사무총장을 '지구 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이라고 일컬었던 트뤼그베 리 초대 사무총장 재임 시절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다. 따라서 누가 유엔 수장이 돼도 모든 국가들이 만족할 만한 가시적 성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힘들다. '보다 강력한 유엔'을 모토로 세계적 이슈들에 대해 유엔이 뚜렷한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반 총장의 성패는 강대국의 영향력과 목소리를 높여가는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거중조정(居中調停) 능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달려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제 '만인의 연인'보다는 '난세의 영웅'이 되어 지구촌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보다 당당하게 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흠 잡히지 않는 조용한 외교에서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5년 뒤 세계인의 기억에 남을 성공적인 업적을 남긴 '영웅의 귀환'을 기대해본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23/20110623025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