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map

Academic Event

Re-examing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 The international Context and Its Understandi

2010.11.04 81094

 

[2010년 국제학술회의]
 
 
• 제목: '한국병합'의 세계사적 재조명 : 국제적 환경과 인식

• 일시: 2010년 10월 30일(금) 10시~18시

• 장소: 고려대학교 국제관 국제세미나실

 

* 발표문 전문을 첨부파일로 올려 놓았음.  

 

본 연구소는 2010년 1030 고려대 국제관 국제회의실에서 '한국병합' 세계사적 재조명 " 국제적 환경과 인식'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현재 한일 양국의 각계 각층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지 100년을 맞이하여, 한국병합’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나오토 일본 총리는 8 담화문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한국인들의 뜻에 반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라고 밝혔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100년 전 강제 병합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이제 한일 양국은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화답하기도 했다. 

10월에는 한일 학자들이 참여한 ‘신시대 공동연구’팀은 ‘일본이 무력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반대를 억누르고 한국병합을 단행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한일 양국 정상이 이를 공동선언으로 채택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병합 조약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논쟁과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과거사 청산 문제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동북아 국제정세가 100년 전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유사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한국병합’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을 조망하는 연구는 아직 일천한 현실이다.

  

이에 연구소에서는 작년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으로 “헤이그 평화회의(1907) 이후 동아시아 국제체제와 한일병합의 재조명”을 주제로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연구의 연장선에서 이번 학술회의를 준비하게 되었다. 2년에 걸친 연구에서 공동연구진들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한국병합’의 역사적 의미를 한국과 일본의 양자 관계를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침략을 본격화했던 서구 열강의 다원적 관계 속에서 밝히고자 했다.

 

2010년 1030 진행된 학술대회는 연구소 이내영 소장의 인사말과 동북아역사재단 김영소 사무총장의 축사로 막이 올랐다. 이내영 소장은 인사말을 통해 학술대회의 개최의의를 21세기 한일 양국의 역사화해를 토대로 평화지향적인 동아시아 국제 환경을 모색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본 학술회의는 총 3부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먼저 1부에서는‘병합에 대한 열강의 정책과 인식’을 주제로 △‘미국 대통령 태프트의 대일특사외교와 한일병합조약의 법적 추인, 1910-1911 △‘한일병합’에 대한 러시아인의 반응 : 러시아 언론에 비친 한국 이미지 △일본 역사학의 식민지 인식 - 조선사를 중심으로 등의 발표 및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발표인 최정수 박사의 <미국 대통령 태프트의 대일특사외교와 한일병합조약의 법적 추인, 1910-1911>은 일본이 한국과 열강간의 통상조약을 소멸시키기 위해 한일병합조약을 필요로 했다는 점, 한일병합조약을 추인받기 위한 미일 간 작업이 있었다는 점, 추인을 얻으려면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에는 종료해야 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 발표는 그동안 기존 연구가 간과했던 한일병합조약의 실체를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 속에서 조명함으로써, 한국병합을 국제적 환경 속에서 재조명하는데 의의가 있었다. 이에 대해 토론자 김원수 교수는 본 발표가‘왜 일본이 1910년이라는 시점에서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는지’를 역사적 추이에서 추적하는 새로운 역사담론을 구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부여했다.

 

두 번째 발표인 이고르 예르마첸코 교수의 <한일병합’에 대한 러시아인의 반응 : 러시아 언론에 비친 한국 이미지>에서는 ‘한국병합’ 당시 러시아 언론에서 한국의 운명에 관한 화법과 러일전쟁의 결과 그리고 전쟁 이후 러일관계의 상황에 관한 화법 간에 존재했던 긴밀한 감정적 관계, 프리아무르 지역으로의 한인 이주에 대한 입장, 한국에 대한 일본 행동이 어느 정도의 진보적 성향을 지녔는가에 관한 문제 및 ‘황화’라는 주제를 둘러싼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 간의 이념투쟁 등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분석했다. 이에 대해 민경현 교수는 러시아 언론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해서 한국병합 문제를 분석한 점에 있어서 참신한 해석이라고 평가했다.

 

세 번째 발표인 오가와라 히로유키 박사의 <본 역사학의 식민지 인식 - 조선사를 중심으로>는 일본의 역사연구가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명확하게 한 다음, 일본에 의한 조선식민지지배의 한 형태인 ‘문화정치’라는 것이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대하여 검토를 시도했다. 이에 대해 방광석 교수는 오가와라 박사의 발표문이 ‘지배논리와 피지배 측의 논리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식민지 통치의 양상을 규정하는지를 동태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에서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을 해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으로 2부에서는 ‘병합’을 바라본 국내외 반응‘을 주제로 △고종의 한일병합저지 계획과 연해주 망명정부(1909-1910) △일제의 ‘대한제국강제병합’에 관한 중국언론의 보도와 논평 △영국과 미국 주요 신문에 나타난 ‘한국병합’ △ ‘한일병합’ 전후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국내외 한인 언론의 인식 등의 발표 및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발표인 최덕규 연구위원의 <고종의 한일병합저지 계획과 연해주 망명정부(1909-1910)>는 1910년 6월 중순 전한국군 대령 이갑은 상해주재 러시아상무관 고이에르에게 대한제국의 의병총대장 고종황제가 연해주망명을 결정하였음을 통고한 사실에 주목해서, 이는 일본에 의한 한국의 강제병합이 목전에 임박했음을 감지한 고종황제가 일본의 야욕을 좌절시키기 위해 시도한 최후의 히든카드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허동현 교수는 고종의 망명정부 수립 계획이 안중근의 사상과 의거의 역사적 가치와 어떠한 상관관계 속에 역사적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두 번째 발표인 權赫秀 교수의 <일제의 ‘대한제국강제병합’에 관한 중국언론의 보도와 논평>에서는 한국병합에 대한 중국언론의 입장을 네 가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당시 중국언론은 일제의 한국병합이 사실상 “병탄”이라는 식민 침략적 본질을 대체로 정확하게 지적하여 한국병합 당시 가장 동정적인 시각과 입장에서 가장 많은 보도와 논평을 발표한 외국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당시 중국 언론의 보도와 논평은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망국”을 슬퍼하고 동정하는 기조와 더불어 그와 관련한 일본의 침략 근성 및 중국 침략 위협 가능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셋째로 한국의 “망국”교훈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면서 아울러 청정부의 정치개혁 및 중국국민의 각성을 적극 촉구하였는데 여기서 한국역사와 문화 특히 한중 두 나라 역사관계에 대한 인식의 문제점을 노출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박정현 교수는 당시 중국 측 언론의 분석이 세계사적 환경 속에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한국문제가 장차 중국 내 국경문제, 만주문제, 한국 내 화교문제, 향후 중일 관계 등과 연관지어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세 번째 발표인 김지형 연구원의 <영국과 미국 주요 신문에 나타난 ‘한국병합’>에서는 1910년 ‘한국병합’ 체결 전후 영국과 미국의 주요 신문 타임스(The Times)와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기사를 통해 ‘병합’과 관련된 보도 내용과 그 성격을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두 신문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한국병합을 인정했으며, 특히 타임스의 경우 영일동맹의 바탕에서 일본의 한국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음을 밝ㅎ리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 관련 뉴스원의 대부분이 일본의 신문과 도쿄 주재 통신원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Leighanne Kimberly Yuh 교수는 미국과 영국 언론의 미묘한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입장 차이를 세밀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마지막 발표인 최덕수 교수의 <한일병합’ 전후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국내외 한인 언론의 인식>에서는 한국병합 직전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 특히 고종 퇴위로 즉위한 순종의 순행,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그리고 한국병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 해외 한인의 언론에서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석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망국인으로 전락한 미주 한인들이 미래 ‘대한’건설자로서 공화제에 입각한 정치체제를 구상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최기영 교수는 안중근 의거에 대한 해외 한인 언론의 인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주재 한인 언론의 교차 분석 등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3부 종합 토론에서 좌장으로 참석했던 김도형 교수는 이번 학술회의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한국사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부에서 바라본 한국에 대한 시각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대표적 언론에서 나타난 기사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참신한 접근 방법이었다. 둘째, 일제의 한국병합 연구가 전반적으로 1910년을 기점으로 종료되는 경향이 있다. 병합 이후의 연구 역시 일본의 식민통치에 집중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본 학술회의에서는 일본의 한국병합이 1910년 8월 27일 조약 체결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로 한국 문제에 관여한 일본 이외에 중국,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의 동향과 연관지어 분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그 동안 한국사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국제적 환경에 대한 교차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Site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