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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Papers

중일전쟁 시기 국통구 대외무역과 국민정부의 무역정책 (박정현, HK 연구교수)

2011.03.03 Views 2370

논문제목: 중일전쟁 시기 국통구 대외무역과 국민정부의 무역정책


저자 : 박정현


출판사항 : 역사교육논집 41권, 2011년 2월 


 


초록 


 


국통구의 공업은 중일전쟁 전의 10% 수준으로 축소되어 공업제품을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했다. 이에 국통에서는 부족한 물자를 수입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수입은 계속 확대되었다. 반면 수출은 환율을 고려하면 계속 감소 추세였다. 이에 따라 무역적자가 확대되었고, 무역적자는 외국 차관과 법폐 발행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통화 발행을 통한 국가 재정 부족의 해결은 법폐 가치 하락을 가져왔다. 전쟁 이후 국통구 수입에서 미국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동남아 국가와 인도의 비중이 상승했다. 반면 일본과는 무역이 거의 단절되었다.


 


국통구의 수출입 상품구조도 변화했다. 주요 공업지역이 일본군에 점령당해 국통구에서 제조품의 수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통구의 주요 수출상품은 미국, 소련이 제공한 차관을 상환하기 위한 易貨商品이었던 桐油, 차, 돼지털, 양모, 광산물 등 농/광산물이었다. 국통구의 대외무역 구조는 국통구 내 농업, 공업 발전과 무관하게 군수물자와 생활필수품을 수입하고 농광산물을 수출하는 전시무역체제를 유지했다.


 


전쟁으로 국통구와 윤함구, 상해로 나누어지면서 대외무역의 중심도 이동했다. 전쟁 전 대외무역 중심이었던 상해는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어 쇠퇴하고, 광주가 상해를 대신해서 대외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광주가 일본에게 점령되고, 상해 경제가 회복되면서 상해가 대외무역 중심지 역할을 회복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상해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일본군이 중국 연해지역을 완전히 봉쇄하고 난 뒤, 국통구는 주요 대외 교역 통로를 상실했다. 국통구의 유일한 대외 교역 통로였던 곤명이 제한적이었지만 국통구 대외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여러 지역으로 무역 중심지가 분산되어 이곳에서 소규모 교역이 이루어졌다.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부는 재정 부족이 심각했고, 일본군의 봉쇄로 대외 교역 통로가 제한되었다. 국민정부는 재정 부족을 해결하고 대외 교역 통로의 확보를 위해 대외무역 확대가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국민정부의 무역정책은 수출입 통제를 통해 필요한 물자와 외환의 획득하여 국통구 경제를 안정시키고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일본 상품의 수입을 금지시키고 일본으로 상품 수출을 제한해서 일본의 전쟁 능력을 저하시키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다.


 


일본군은 국민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윤함구 내 물자이동을 제한하고, 국통구의 밀수루트를 단절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일본의 봉쇄를 우회하거나 봉쇄를 뚫고 끊임없이 새로운 무역 네트워크를 개설했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물자를 수입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중국을 대외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중국의 대외 연결 루트를 단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이 봉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여 미국?영국?소련 등 우호국가와 교역하고 이들로부터 易貨借款과 지원을 계속 받았다.


 


중일전쟁 시기 국민정부의 통제 무역정책은 전쟁의 와중에서 한정된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실시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통제 무역정책은 상해나 윤함구에서는 실시되지 못하고 국통구 지역에서만 실시되어 국통구의 수출입상만 차별적으로 손해를 감수했다. 그리고 이것을 운영할 조직도 갖추어지지 않아 효과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더욱이 통화팽창과 통제정책은 법폐 가치 하락, 물가상승, 경제의 과도한 집중화 등 부작용을 낳았고, 이는 전쟁이 끝난 뒤 국민정부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주제어 : 조계, 거류지, 순사청, 계사국, 해관, 원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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