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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공지] 2013년 아세아문제연구소 제5차 HK 워크숍

2013.09.03 7013

2013년 아세아문제연구소 제5차 HK 워크숍

 

 

발표자: 이형식(아세아문제연구소 HK교수)

제목:  "패전 후 귀환한 조선총독부관료들의 식민지 지배 인식과 그 영향"

 

시간과 장소: 2013년 9월 23일 오후 4시 30분, 아연 3층 대회의실

 

 

<발표문 초록>

귀환 후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일본의 중앙, 지방관청에 재취업하거나 정치가(현지사, 시장 등)로 변신하거나, 변호사을 개업하는 등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 패전 후의 일본의 사회변화, 사상변화에 조우하여야만 했다. 젊은 관료들은 중앙 성청에 재취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반해, 칙임관(국장, 도지사)을 역임했던 관료들은 대체적으로 변호사를 개업하거나, 연금을 받으면서 중앙일한협회를 비롯한 한국관련 단체에서 일하면서 한국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생활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재조일본인과 달리,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동화협회, 중앙일한협회, 우방협회를 조직하고 식민지 문제, 한일관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조선총독부 관료는 일찍부터 조선통치사를 집필하려고 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실패하자 외무성, 대장성이 주관하는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조선편 집필에 관여하게 된다. ‘식민지 근대화론’, ‘시혜론’, ‘선정론’으로 점철된 『역사적 조사』조선편은 총독부 관료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조선통치에 대한 결산보고서였고, 이러한 조선통치인식은 한일교섭과정에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정부와 보수정치가의 식민지 역사인식의 원점이 되어갔다.
패전 후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한국은 물론, 하타다 다카시((旗田魏, 한국사학자), 츠보이 시게지(壺井繁治, 시인)로 대표되는 일본 지식인·문화인들로부터 총독부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받으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방협회를 조직하고 통치사료를 수집·정리·출판하였다. 우방협회의 편찬물들은 전후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총독부 관료들의 식민지 경험의 반추이자, 식민지지배에 대한 자기긍정, 자기정당화의 산물이었다. 『역사적 조사』조선편에서부터 시작된 전후 총독부 관료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지주의는 우방협회를 통해 정교화되면서 확대・재생산되어갔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한일교섭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를 비롯한 중앙일한협회는 한일회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회담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거나 자문에 응하는 형태로 일본정부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도록 원조했다. 다나카는 구보타(久保田) 발언 이후 일본정부의 한국정부에 대한 연약외교를 비판하면서 한국정부에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을 시종일관 주장했다. 이 때문에 대만총독부 관료를 지냈던 이시이 미츠지로(石井光次郎)가 전후 ‘親臺派’를 형성했던 것과 달리, 야기 노부오(八木信雄)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전후 한일관계에서 ‘친한파’ (korean lobby)의 주역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부식되지 않는 제국의식, 식민지 지배책임을 망각하는 식민지 인식이 탈식민시대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한편 한일회담을 총괄하는 외무성 아시아국에는 이세키(伊関祐次郎)-마에다(前田利一)-모리타(森田芳夫)로 연결되는 한국인맥이 형성되게 되는데, 이들의 식민지 경험이 실제 외교정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 하겠다.
이처럼 귀환한 총독부 관료들의 식민지 지배경험은 전후 일본사회의 식민지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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