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욱 / 고려대 교수·북한학,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김일성은 생전에 소련이 자신을 지도자로 간택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소련은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민족주의자 조만식, 남로당 수장 박헌영보다는 김일성을 적임자로 판단했다. 모스크바의 책봉으로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49년간 북한을 통치하면서 소련을 거쳐
러시아와의 외교를 치밀하게 관리하는 데 골몰했다.
특히
중국과 소련의 등거리 외교에 초점을 맞췄다. 대중(對中) 외교가 풀리지 않을 때는 대러
카드를 활용했다. 반대로, 역방향 전술도 구사했다. 양국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교묘하게 균형추를 흔들었다. 1994년 집권한 김정일은 공산권의 몰락과 한국의 북방외교 등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그는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을 번갈아 방문하며 구걸 외교에 열을 올렸다.
라일락의 계절 5월 초, 3대 세습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모스크바 방문이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그의 러시아 방문은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우선, 집권 4년 차가 되도록 베이징(北京)의 초청이 없는 상태에서 러시아는 중국을 흔들 수 있는 요긴한 조커 카드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 등으로 중국과 이견이 크다. 이러한 때 중국의 김정은 길들이기를 중단시킬 수 있는 기막힌 시기가 온 것이다. 또 하나는, 전통적인 등거리 외교의 재현이다. 북한은 지리적 전략성을 최대한 활용한 중·러 셔틀 외교로 국익을 극대화한다.
외교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북방 대국 지도자들과의 정상회담은 불가피하다. 압록강을 건너기 어려우면 우선 두만강을 넘는 일석이조의 우회 전략이다. 젊은 지도자는 러시아가 만든 축제 무대에 서며 국제적 입지를 다질 것이다. 동시에 대미 강경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대러, 대중 정상회담은 경험이 부족한 통치자의 불안한 내치를 진정시키는 양수겸장이다. “원수님 먼 길 다녀오셨습니다”던 1980년대 중반의 김일성 향수를 평양의 인민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거 김일성 순방외교를 연상시키는 절묘한 데자뷔 전략이다.
2월 하순 알렉산드르 티모닌 신임 주한 러시아 대사와 오찬을 했다. ‘평양과 서울’ 한반도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한 한반도 전문 외교관이다. 한국어에 능통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깔끔한 외모에 진중한 언변으로 매력적이고 노회한 외교관이다. 고종이 1896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떠올랐다.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항해 1885년
영국이 여수 인근 거문도를 점령하는 등 양국이 한반도에서 대립했다. 러시아의 한반도 관심은 뿌리가 깊고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다.
티모닌 대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戰勝節·5월 9일) 방문을 희망했다. 김정은을 비롯해 세계 50개국이 정상의 참석 의사를 전해왔다고 밝혔다. 양국이 요청하면 모스크바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도 지원하겠다고 한다. 최상의 의전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대사는 김정은을 비롯한 평양 권부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일부 소회를 밝혔다.
아마 신임 대사의 최초 미션은 한국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을 성사시키는 일인 것 같다.
청와대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방러 안건은 외교 당국자의 표현대로 머리가 깨질 듯이 골치 아픈 문제다. 벌써부터 ‘징비록’에 묘사된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연상시킨다. 핵심은 박 대통령과 김정은의 조우가 아니다. 한국 외교에서 러시아의 비중이 어느 정도이냐다. 청와대의 유라시아 구상은 6자회담 당사국인 러시아와 연계된 다자외교 사안이다. 향후 각종 한·러 협력도 검토 사항이다.
한·미 동맹은 우리 외교의 핵심축이다. 워싱턴의 부정적인 입장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다. 중국까지 나서 9월 전승절 행사에 각국을 초청하고 있어 외교의 방정식은 점점 다차원이 되고 있다. 광복 분단 70주년이 열강의 국력 과시 퍼레이드 해로 변질되고 있다. 김정은의 러시아 유착과 한반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등으로 다급해진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최초로 북·중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를 언급하고 있다. 평양은 동북아 북방외교의 틈새를 합종연횡 전략으로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다. 우리의 대응 전략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