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10. 5. 17] [學而思] 인문한국사업 단상
2010.06.04 3812
이내영 고려대·정치외교학과
필자가 소장을 맡고 있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는 2008년도 인문한국사업 해외지역 분야의 지원기관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는 학제 간 공동연구를 통해 국제적 수준의 동북아 종합지역연구소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개인적으로는 인문한국 사업단을 꾸리기 위한 행정업무가 생각보다 많고 개인 연구의 시간이 대폭 줄어들면서 교수행정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지만, HK사업을 통해 연구소의 연구역량이 높아지고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위안을 삼는다.
그동안 HK사업단 선정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고 HK사업의 취지에 대한 오해와 비판의 목소리도 가끔 접하게 되지만, 아세아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인문학과 지역연구 분야의 대표적인 대학 연구소들이 HK사업을 통해 연구역량을 확충하고 국제적 수준의 연구소로 도약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게 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문사회 분야의 한국의 대학 연구소들이 대부분 매우 열악한 시설과 재정 여건, 그리고 부족한 연구역량을 가지고 명맥만 유지해 왔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세아문제연구소의 경우 역사도 오래 됐고 한국의 대학 연구소 가운데 드물게 독자적인 건물과 도서관을 보유하는 등 형편이 좋은 편이지만 동아시아와 관련해 명성을 가진 해외 대학 연구소와 비교하면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다.
우선 저명한 해외 대학연구소들이 상당한 규모의 기금을 바탕으로 활발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자체 보유기금의 규모도 적고 학교의 재정지원도 미미하기 때문에 외부 연구비의 수주여하에 따라 연구소 활동의 부침이 매우 큰 편이었다. 그러나 HK사업에 선정된 이후 10년 동안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다수의 전임 연구 인력를 충원할 수 있었고, 꾸준히 연구 성과를 축적하게 되면 국제적 수준의 연구소로 도약할 수 있다는 비전과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나의 판단으로 HK사업의 특징이자 장점은 대학연구소에 소속된 정년트랙 전임교원을 상당수 확보하도록 의무화한 점이다. 그동안 대학연구소는 학과 소속 교수들이 주축이 되고 비전임 박사들이 연구교수로 참여하는 형태로 운영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학과 소속 교수들의 연구소 참여도 지속적이지 못하고, 비전임 연구교수들에게 연구소는 전임교수 자리를 확보할 때까지의 임시직장이기 때문에 연구 인력의 이동이 빈번하면서 연구역량이 축적되지 않고 지속적인 연구를 하기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HK사업은 연구소가 우수한 연구역량을 안정적으로 보유하고 지속적으로 연구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기획으로 평가할 수 있다.
HK사업을 통해 연구소의 역량과 활동이 증가하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HK사업을 운영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다. 우선 오랫 동안 한국 대학의 운영과 문화가 개별 학과를 단위로 해 이뤄져왔기 때문에 학과가 아닌 연구소 소속 전임교원을 낯설어하고 2등 교원으로 보는 대학 내의 편견을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자주 느끼게 된다. 또한 10년 이후에는 연구소 소속 전임교원의 인건비를 대학이 전부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부담스러워 하는 대학본부를 상대하는 일도 어려운 과제다. 특히 대학본부가 연구소에 소속돼 있는 새로운 유형의 HK 전임교원의 위상과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본부를 설득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HK사업단의 책임자로서 겪고 있는 다른 어려움은 학제 간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란 것이다. HK사업을 구상하면서 기존의 국가별, 학문별로 이루어진 분절적 연구 대신 종합적인 학제 간 지역연구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전공의 연구 인력을 충원해 공동연구를 시도해왔다.
그러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망라한 7~8가지의 상이한 전공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을 조율하면서 개별 학문의 높은 장벽을 넘어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고, 결국 학제 간 공동연구가 성과를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타 학문에 대한 열린 마음과 인내심을 갖고 끊임없는 소통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 있다.
이내영 고려대·정치외교학과
필자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반미여론과 한미동맹」, 저서로는 『유권자 투표행태 변화와 한국정치』가 있다.
원본위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411